[조선일보 2005-10-04]
[조선일보 조의준 기자]
“이 사람 웃네. 이렇게 걸으니 옛날 청계천에서 데이트하던 생각이 드나 봐.” 황영옥(74) 할아버지와 문점문(67) 할머니는 손을 꼭 잡았다. 혹시 햇볕에 할머니의 얼굴이 그을릴까 연방 모자를 고쳐 씌워주는 할아버지. 스무 살 첫사랑 같다. 황 할아버지는 “이 사람이 몇 년 전에 뇌 수술한 뒤 정신이 맑지가 않아. 그래서 웃는 일이 많지 않은데…. 청계천이 집사람을 다시 웃게 했네”라고 말했다.
3일 조선일보 주최로, 롯데건설과 MBT코리아가 협찬한 ‘청계천시민걷기대회’. 서울 청계광장을 출발해 동대문구청 앞 고산자교까지 5.8㎞에 이르는 청계천 복원 전 구간을 2시간 가량 걷는 이번 대회에 3만여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출발지에서 100m쯤 떨어진 광통교 위에서 벌어진 거리 음악회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 한빛맹학교 학생들이 노사연의 ‘만남’을 연주했다. 이어진 클론의 ‘쿵따리 샤바라’. 참가자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큰 박수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박민수(58)씨와 유경복(여·56)씨는 조흥은행 본점 앞 광교에서 V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했다. 사진사는 박씨의 아들 재용(25)씨. 박씨는 “저 건너편에 ‘명다방’이랑 ‘자양당 빵집’이 있었는데 최고의 데이트 코스였지. 옛날 기분 좀 내려고 아들까지 불러서 사진 찍고 있다”고 했다.
방현수(32)씨는 온몸을 태극기로 감싼 채 걷기대회에 참가했다. “개천절에 청계천 물길이 열린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연인 사이인 이충현(29)씨와 김은정(여·26)씨는 걷기대회 내내 새살거렸다. 서로 밀고당기고 목을 감으며 추억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김가영(10)양과 하민지(12)양은 “한강보다 훨씬 놀기 좋아요”라고 외치며 손을 잡고 도로를 뛰어다녔다.
고산자교 도착점에 도달한 이규현(12·자폐아동)군은 ‘좋다는 뜻’으로 손을 가득 벌려 동그라미를 그렸다. 규현군과 함께한 30여명의 다른 자폐장애아도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며 자원봉사자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를 하고 있다는 필리핀 출신의 노라(여·38)씨는 “1년 전쯤 한국에 왔는데 오늘만큼 즐겁게 시내를 걸어본 적이 없다”며 “앞으로도 일하다 힘들 때면 청계천에 나와서 쉬어야겠다”며 웃었다. 사흘동안 청계천을 찾은 시민은 170여만명에 이른다.
(조의준기자 [ joyjune.chosun.com])